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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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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를 넘어 여성을 넘어 시대의 길을 밝힌 참민중 이소선

    글쓴이 : 차우미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발기인)

       프롤로그

    엄마의 꿈이 된 아들의 꿈
    아들처럼 배고픈 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양말을 꿰매주며
    청계피복노동조합설립
    여성노동자들에게 열어준 노동교실
    엄혹했던 시절 서슬퍼런 감시 속에
    수차례 견뎌야 했던 감옥살이
    40년
    가장 배고프고 차별받는 사람들 곁을 지킨
    아들과의 약속을 지킨 40년
    매끼 한주먹 약으로 견디며
    고단한 몸 고단한 엄마
    (지식채널e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인간 차별하는데는 대가리 터지도록 싸워
    못배웠고 돈없고 나한테 하는 거는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지만 남한테 하는 거는 못 본다 왜 인간은 날 때부터 인권은 똑같이 타고 났다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이가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똑같이 타고 났어!"

     

     

       당찬 용기와 총명함을 지닌 아이 이소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열사는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에서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딸 아이를 보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름을 ‘작은 선녀’ 소선(小仙)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소선이 서너살 때 아버지는 항일 농촌 운동을 하다 일제에 의해 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이소선 또한 일제 말기 근로정신대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하다 간신히 탈출하여 산에 숨어 지내던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민종덕이 쓴 이소선 평전에 의하면 이소선은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분명한 아이였다. 어머니의 후처살이로 동네에서 따돌림 당하며 무시 받던 이소선은 문중의 어르신들을 찾아가 ‘그것들’이라고 불리는 자신에 대한 따돌림과 차별에 대해 항의 했다고 한다. 이소선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문중의 어른들에게 어머니의 후처살이로 함께 온 자신과 가족을 향한 멸시와 차별에 항의할 수 있었던 용기와 총명함을 지닌 아이였다.

     

     

       고난의 시대 보다 더한 고난의 일상

    이소선 어머니는 1947년 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와 결혼하였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의류 제조 공장에 다니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건이 마무리 된 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봉틀을 마련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소선 어머니는 중매로 결혼하였고 결혼 전에야 신랑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1948년 음력 8월 24일 첫 아들 전태일을 낳았다. 전태일을 잉태했을 때 잉어가 구슬을 가슴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1950년 6월 15일 둘째 전태삼을 낳았다. 1953년 셋째 전순옥이 태어났다. 전쟁 후 남편이 서울로 상경하자 아이들과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이소선은 처마 밑에서 아이들과 밤새도록 노숙하는 생활을 견뎌냈다. 남편이 남대문시장에 자리를 잡고 공장을 차려 경제적으로 좀 안정이 될 즈음 막내 전순덕이 태어났고 전태일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다시 이리 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던 가족은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갔다. 전태일은 당시 부산까지 떠돌다 비쩍 마른 모습으로 대구에 왔다. 대구에서 다시 모인 가족은 다시 재봉일을 하며 살았고 정식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한 전태일은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전태일은 스스로 쓴 수기에서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1964년 어머니 이소선은 일을 구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상경하였다.
    1966년 판자촌에 불이나 이재민이 되었다. 이소선은 과로와 충격으로 눈이 멀었고 이웃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멀었던 눈은 차츰 돌아왔고 모든 식구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당국은 이재민에게 천막 하나를 주고 도봉동 개울가로 내몰았다. 이소선의 가족은 쌍문동 공동묘지 근처 208번지로 이사하였다. 이소선이 살던 쌍문동 집은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친구들과 자신의 집에 모여 앉아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여러 사람이 앉아야 해서 전태일은 단속반 때문에 집을 헐었다 지을 때 마다 방을 조금씩 넓혀 지었다. 쌍문동 판잣집은 1980년 재개발 때 철거되었으며, 1969년 6월 남편 전상수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들의 분신 앞에서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아들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엔 쉬게 하라!” 등 살인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을 구호로 외치며 분신하였다. 이소선은 전태일에게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
    이소선 어머니는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협박 및 빌딩 한 채를 살 수 있는 액수의 매수공작을 단호히 물리치고, 긴급한 노동조건 개선조치와 노조 결성 보장 약속을 받아낸 후 닷새만인 11월18일 전태일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1월27일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해냈다. 청계피복노조는 1998년 서울의류노동조합과 합쳐져 해산할 때까지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에서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의 각성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운동을 시작한 후 노동교실을 열고 노동자를 교육하고 동시에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도 함께 하였다. 청계피복노조는 1972년에는 새마을노동교실을 열었고 1975년에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벌였으며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강제 해산 시켰지만 법외 노조로서 버텼다. 1985년 대우어페럴 노조에서 시작된 구로동맹파업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1986년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청계피복노조는 1988년 다시 합법화 되었다.
    이소선은 또한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서둘러 사형시킨 뒤 화장시키려 하자 그 앞을 막아선 사람도 이소선이었다. 이소선은 헌옷을 팔아 생계를 꾸리면서도 노동운동가나 민주화 운동가가 수배를 당하면 그를 숨겨주고 먹이고 재웠다. 수많은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이 이소선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로인해 훗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에서 부터 평화시장의 어린 시다까지 이소선을 어머니라 불렀다. 전태일의 장례를 도왔던 장기표를 비롯해 조영래 등 서방질을 한다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피신시켰다. 이소선의 판잣집을 거쳐간 사람들은 훗날 대통령이며 장관이 되기도 했지만 이소선은 늘 현재의 노동자 편에 서고자 했다. 또한 1986년에는 민주화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투쟁의 현장, 핍박과 억압에 대한 항변과 격돌의 장에는 언제나 어머니 이소선이 있었다.그렇게 어머니는 전태일 동지와 같이 산 22년보다 더 많은 세월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핍박받는 민중들의 어머니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사기관에 잡혀가고 구류를 살고 구속된 횟수가 250번을 넘는다고 했다(하종강, 2011). 법무부 문서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180번이나 구류처분을 당했고 3년여의 옥살이를 치룬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김남일, 2011, 재인용).
    이소선은 어디를 가서 이야기를 하던 제발 살아서 싸워라 살아서 싸우고 살아서 바꾸라고 이야기 했다. 이소선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장례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3년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가 분신 사망하였을 때에도 장례위원을 지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에도 장례위원을 지냈다. 이소선은 원진레이온 사태 때부터 노무현과 인연을 맺었고, 이석규 장례투쟁에서는 함께 장례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소선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스스로도 체포 구금 실형 등을 받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소선은 80세의 고령에도 계속하여 부르는 곳이면 마다 않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부른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는 않았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태일노동상의 시상을 마치고 내려가다 다시 마이크를 붙잡고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고 늘 노동자의 하나된 단결을 강조했다. 2009년 전태일 39주기 추모식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플래카드에 이름을 올리자 이제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였다.
    이소선은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입원하였다. 바로 그 때까지도 이소선은 김진숙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한 희망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해 1월에는 김진숙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통해 “절대로 죽으면 안되니까, 소금에 찍어 먹어도 밥 묵고 힘내세요. 죽으면 안 된다고 살아서 싸워서 이겨야 되니까 어떻게든지 살아야 돼요.”라며 살아서 싸워야지 죽으면 안된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2011년 9월 3일 이소선은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장례는 9월 7일 유가족과 노동계를 비롯한 많은 시민이 함께 하는 가운데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묘소의 뒷편에 묻혔다. 이소선의 민주사회장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가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에필로그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와 어머니의 41년간은 파란만장 기구한 삶의 연속이었다. 유년기 아버지의 죽음, 오빠를 살리기 위한 어머니의 개가, 세끼 연명조차 힘들었던 가정 형편에, 의붓자식에 대한 차별과 박대, 형제의 생이별, 근로정신대의 강제노동 등 어릴 적 경험들은 가혹한 시련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글자를 깨우치려 노력하고 차별에 항의한 일, 목숨 건 공장 탈출 등의 행동은 비슷한 나아의 또래들에 비해 당돌하다고 할 만큼 당찬 투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이 들면 절대 굽히지 않을 만큼 똑 부러”진 아버지의 성격을 타고난 것일 것이다(이원보, 이소선어머니와 노동운동, 2013). 이소선이 피신을 도왔던 장기표는 이소선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이소선 어머니의 인생역정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 그에게 감당토록 한 운명적인 인생역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즉 고난과 시련, 그것도 지독한 고난과 엄중한 시련을 통해서만 더 없이 큰 지혜와 더없이 큰 사랑을 얻는 것이 인생의 이치임을 보여주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장기표, 2008: 165)
    한편 “안 보이는 벽과 창살이 우리를 가두고 옥죄고 있어서 그 단단한 벽을 허물기 위해 아주 작은 바늘구멍이라도 내기 위해” 한 목숨을 바쳤던 아들 전태일과의 약속을 몸이 부서지도록 실천했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를 통해 핍박 받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독재의 억압에 대해 각성한 한 사람의 운동가이자 실천가로 거듭 나게 된다.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 민주화운동의 어머니로 불리어지게 된 이소선은 투쟁의 현장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공권력의 부당한 탄앞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던 폭압의 시대에 항거한 운동가이자 실천가였다. 일상에서 먹거리와 입을 거리를 제공하며 투쟁의 현장에 있었고 좌절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늘 의연하고 타협하지 않는 단호함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으며 핍박 받는 자들의 기댈 언덕이 되어 주었던 이소선의 성품은 고귀하게 인류사에 기억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태일의 어머니를 넘어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니라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온 삶을 불살랐던 한 인간 이소선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 전태일이 있었음이 자랑스러운 것처럼 아들과의 약속을 스스로의 삶속에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실천으로 승화한 한 위대한 투사 이소선을 역사 속에 기억해야 하리라.

    “우리는 언젠가 승리 할낍니다!”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삽니다!”
    “하나가 되면 이깁니다!”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연보

    1929
    ~
    2011

    1929년 12월 9일

    • 경북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출생

    1933년

    • 일제에 의해 아버지 학살

    1944년

    • 정신대에 끌려가 대구 방직공장에서 1년간 강제노동

    1945년

    • 정신대 탈출, 8.15 해방 맞음

    1947년 11월 2일

    • 전상수와 혼인

    1948년 9월 28일

    • 장남 전태일 출산

    1950년

    • 한국전쟁 으로 부산 피난 자갈치 시장 생활. 7월 29일 차남 전태삼 출산

    1954년 6월 15일

    • 장녀 전순옥 출산

    1960년

    •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

    1962년

    • 다시 대구로 이주

    1964년

    • 단신으로 서울 상경

    1966년

    • 남산동 대화재의 충격으로 실명. 쌍문동 208번지 이사

    1966년

    • 남편 전상수 사망

    1970년 11월 13일

    • 전태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노동자 권익쟁취를 부르짖으며 분신 항거, 사망함

    1970년 11월 16일

    • 아들 전태일 장례식

    1970년 11월 27일

    • 청계피복노도 결성. 고문으로 추대

    1970년 2월 20일

    • 후생식당 개소, 노동자를 위한 국수 삶기

    1971년 9월 2일

    • 사용주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으로 노동들이 당하는 불이익에 항의 투쟁

    1973년 5월 21일

    • 노동교실 개관

    1975년 12월 23일

    • 시간단축 농성 투쟁 주도

    1976년 4월 16일

    • 노동교실 실장 위촉

    1977년 7월 22일

    • 법정모욕죄로 구속

    1978년 8월

    • 만기출소

    1978년 9월 22일

    • 동일방직 노동자들 기독교회관 연극 공연 뒤 시위 참가 심한 구타를 당함

    1979년 8월 11일

    •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김경숙 열사 사망

    1980년 4월 7일~17일

    • 청계피복노조 임금 인상, 퇴직금 확대적용 등 단체협약 갱신체결 투쟁

    1980년 5월 17일

    • 계엄당국 수배

    1980년 10월

    •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1981년 2월 2일

    • 계엄포고령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등 구속. 징역 10월

    1985년 12월 12일

    •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공동의장

    1986년 8월 12일

    •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창립 회장에 선임

    1978년 9월 22일

    • 동일방직 노동자들 기독교회관 연극 공연 뒤 시위 참가 심한 구타를 당함

    1987년

    • 6월항쟁 참가

    1987년 8월 27일

    •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열사 장례식 참가하다 경찰 수배

    1988년 10월 17일 ~ 89년 2월 27일

    •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 135일간 전개

    1988년 1월 20일

    •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발족, 고문 추대

    1990년 3월

    • 범민족대회 판문점 예비회담 남측 대표로 참가하려다 불구속 입건

    1990년 1월 22일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발족, 고문 추대(95년까지 역임)

    1990년 4월 18일

    • 사월혁명상 수상

    1990년 8월 20일

    •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지시 무죄선고에 대한 항의로 치안본부에서 3일간 시위 전개

    1991년 12월 1일

    • 전국연합 고문 추대

    1992년 10월 17일

    • 유가협 운영위원 선임

    1993년 5월

    • 전국해고자협의회 지원대책 상임의장

    1995년 11월 11일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결성대회 참가

    1996년 2월 19일~3월 6일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베를린 영화제 출품 영화제 및 독일교민을 위한 강연회망

    1988년 10월 4일

    •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국회 앞에서 농성 시작

    2000년 8월

    • 비전향 장기수 범국민환송준비위원회 고문

    2000년 9월

    • 한국전쟁 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고문 역임

    2011년 3월

    • 한진중공업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격려방문

    2011년 6월 11일

    • 한진중공업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에게 편지 통해 격려

    2011년 7월 18일

    • 심장이상으로 병원 이송

    2011년 9월 3일

    • 별세